정도전의 죄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어서 이듬해(1392년, 공양와4) 봄에 귀양에서 풀려나 고향인 영주로 돌아왔다. 이때 그의 나이51세였다. 그러난 정도전의 불운은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이해 4월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하는 사고가 생겼다. 이 사건은 혁명파에게는 최대의 위기를 가져왔다. 이 기회를 포착하여 시중의 자리에 있던 정몽주는 정도전, 조준, 남은 등 이성계의 핵심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간관 김진양, 강회백, 정희 서견등으로 하여금 탄핵 상소를 올리게 하였다. 그런데 이들의 상소문에도 또다시 정도전의 출생을 거론한 것이 눈길을 끈다. 예컨데 김진양은 "정도전이 천한 곳에서 몸을 일으켜 당사의 자리를 훔치고, 천한 뿌리를 감추기 위하여 본주를 모함하였다"고 인신공격을 퍼부었다. 여기서 천한 뿌리를 감추기 위하여 본주를 모함하였다는 것은 우현보 일족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서 정도전이 우현보를 탄핵한 것은 우현보에 대한 사감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정도전의 출생을 문제삼은 정적들은 위에 든 인사 말고도 이확, 이래, 이감, 권홍, 유기, 김주 등 쟁쟁한 유신들이 많았다. 이 사시을 뒤집어 생각하면, 우현보 일족뿐 아니라 전도전의 모든 정적들이 정도전의 출생의 약점을 알고 그를 멸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도전에 대한 인신공격을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을 것이요, 그를 더욱 과격한 인물로 만든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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