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제국 - 21세기 우리가 배울 것은?
IFP 2기 심재헌
다름을 포용하라 – 청의 다양성
처음 해외 출장을 갔을 때의 일이다. 싱가폴에서 지하철을 처음 탔을 때, 지하철의 안내방송을 듣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도비 가”. 이게 끝이었다. 무슨 지하철의 안내방송이 이렇게 짧고 불친절할까? 지하철 벽에 붙어 있는 노선 안내도를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 해 보니 역의 이름은 “Dhoby Ghaut”였다. 그런데 그 뒤에 다른 역에 이르자 “다음 정류장은 Raffles Plance“로 추측되는 안내방송이 영어, 중국어, 타밀어, 그리고 말레이어로 4번씩이나 나오는 것이었다. 즉 중요한 교차역에서는 한 마디짜리의 짧막한 안내방송이 아니라, 각각의 언어로 친절하게 안내방송을 해 주는 것이었다. 청나라의 옹화궁의 편액에는 몽골문, 티벳트문, 한문 그리고 만주문이 병기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인 것이다. 이규태선생의 한국인의 의식구조에서 읽었던 한국인의 서열의식이 떠오른다. 한국인은 모두 같은 자로 측정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색깔을 예로 들면 검은 정도에 따라 서열화가 가능한 한가지 색 즉 회색으로 본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인은 그 검은 정도에 따라서 한 줄로 세울 수 있고, 그러한 서열에 따라서 서로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한다는 내용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만약에 빨간색이나 노란색의 다른 색깔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이러한 획일성 및 단순화가 얼마나 편협된 것인가, 그리고 때로는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만약 대청제국이 그 근원지역의 언어를 이유로 만주어를 단일언어로 사용하는 제국으로 통치하고자 하였다면, 다민족 국가로서의 거대한 중화제국의 규합은 불가능했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최근에 우리나라의 출산율저하 및 고령화사회로의 진입에 따른 사회문제나, 21세기의 OECE 국가 최대의 입양아 수출국의 오명의 근본적인 이유는 이러한 다양성의 부족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최근들어 교육과학기술부에서는 “한겨레, 한민족”이라는 용어를 교과과정에서 제외시켰다고 한다. 2000년 이후로 2008년까지만 해도 이미 25만 가구 이상의 국제결혼가정이 있고, 이러한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를 합하면 이미 우리나라는 다민족 국가에 해당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제는 피부색, 종교, 배경이 다른 어린이들이 같이 살아 나가야 하는 시대에 이른 것이다. 이런 우리의 다음 세대인 어린이들도 모두 동등한 기회와 평등한 대접을 해 주어 우리나라의 당당한 국민으로 자랄 수 있어야 하며, 배타적 획일문화의 편협성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배-피지배의 관점에서 관용을 베푸는 차원에서 서로 다른 민족적 배경을 타 민족국가를 쉽게 통치할 수는 없었을 것이며, 또한 한 민족의 문화를 타 민족에게 강제로 적용하여서도 성공할 수 없다는 교훈을 이전의 금나라의 사례에서 이미 학습하였다. 청제국은 농사와 붓을 잡는 것으로 표현되는 한족문화에 비하면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여진문화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하나로 묶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각각은 존중했던 것이다. 언어에서도 또한 자신의 언어를 지키면서 타 언어를 존중해 주었던 것이다. 청제국의 통치원리는 이렇듯이 원래의 풍습에 근거하여 통치를 한다는 인속이치 (因俗而治)에 근거한 것이다. 위그루 지역에서 무슬림을 존중해 주듯이. 이러한 다양성의 수용에는 실제적으로 여러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었다. 소수의 여진족 인원이 다수의 한족을 지배하는 정치형태에서 발생할 수 있는 충돌을 최소화하기 위해 청제국에서는 또한 격리구조(隔離構造) 를 이용한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다민족 통합의 문화를 성공으로 이끈 백미라면 다민족을 아우를 수 있는 새로운 정체성의 부여이다. 홍타이지는 여진이라는 말을 금지시키고, 서로 다른 출신에게 고려계 만주인, 러시아계 만주등 새로운 공동의 아이덴티티 만주를 부여하였던 것이다.
아버지를 넘어서라 – 누르하치와 홍타이지
누르하치의 나라와 홍타이지의 나라는 달랐다. 아버지의 국가를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새롭게 만들어 만주지역의 여진국가에서 중국대륙 전체뿐만 아니라 티벳과 천산을 넘어 신장지역까지를 아우르는 거대 제국건설의 토대를 마련한다. 이를 두고 혹자는 청제국을 누르하치가 세운 후금국의 확대판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홍타이지가 꿈꾸었던 대청제국은 아버지의 세계관보다 훨씬 더 큰 것이었다. 누르하치는 8기를 근간으로 연합정권을 형성하고, 군주의 독선과 오만을 방지하는 연정(聯政)체제의 국가를 그렸다면, 홍타이지는 차하르를 정복함으로써 대원전국의 옥새와 몽골제국의 계승자로 올라서고, 여진과 결별을 선언하고 개국전설을 만들어 내며, 만-몽-한의 관온인성황제로 한-칸-전륜성왕을 통해 작은 세계제국을 이루어 낸다. 누르하치는 명과의 오랜 경험을 연정을 통한 평화적 안정적인 권력구조를 그렸었지만, 상황은 오히려 명과 총력전을 기울여야 하는 긴박한 전시 상황으로서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가 오히려 더욱 절실한 때였다. 이제 새롭게 집권한 홍타이지는 아버지가 만든 나라를 새롭게 만들어서 거대한 대청제국을 건설한 것이다. 하지만, 대청제국도 최고의 전성기에 이른 건륭제의 시대에는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닦아 놓은 길을 답습하면서 제국의 발전은 멈추게 되고 간신히 현상유지에 머무르게 되면서 쇠퇴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항상 깨어 변화를 감지하라 – 명청과 조선
이러한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는 시기에 조선은 사대주의와 국제정세에 대한 판단착오에 빠져있었으며, 광해군의 실리외교의 노선은 인조의 집권으로 실속없는 “명목적” 유교주의로 되돌아 오게 되었다. 또한 외척. 환관, 끊임없는 부정부패의 늪에서 허덕이던 명나라는 명목적인 유교주의의 아집에 빠져 여러 번의 기회를 무산시키며 서서히 대청제국의 물결에 휩쓸리게 되는 운명을 맞이한다.
우리는 단지 인조임금이 “야만민족”의 수장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이유로 의미 없는(?) 적개심으로 청을 바라보는 역사관이 형성되었으며, 그러한 왜곡된 국제인식 때문에 중국을 통일한 커다란 업적을 이룬 대청제국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각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며, 불과 10년전 까지도 못살고 비위생적이라고 비웃던 중국의 놀라운 성장을 또하나의 왜곡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 가 하는 두려움과 함께, 명청 전환기의 중국.조선 역사에서 우리게게 전해준 중요한 교훈을 또다시 잃어 버리게 되지는 않을 까 하는 두려움이 앞선다.
맺음말
몇 해전 송파구 삼전동인근에서 삼전도비가 매우 훼손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었다.삼전도비의 사연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우리땅에 남아 있는 삼전도비를 마음 편하게 바라볼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하겠지만, 맘이 편한 역사의 사실이나 아니면 마음이 괴로운 사실이거나 모두 우리의 역사이고, 좋으나 싫으나 모두 사실인 것이다. 오히려, 그 역사적 사실 속에 들어 있어, 우리 후손들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바른 메시지만을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만주벌판을 헤메던 일개의 오랑케 부족으로 치부하려는 시각도 있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화이사상의 중화통일을 이룬 대청제국을 이루어 낸 힘이 무엇인가를 바로 짚어 볼 수 있었다.
당파와 명분에 빠져 시대의 변화를 읽어 내지 못하고, 실속 없는 대의명분이나, 편협한 사대주의에 빠져 두 차례나 패전의 쓰라린 경험을 하게 되는 조선의 위정자들로부터, 21세기 들어 급격하게 변화 발전해가는 오늘날의 중국을 대한 우리의 바른 태도를 배울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만들어진 정답이 내일도 옳을 수 없는 오늘날의 역학관계의 국제정치 상황에서정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친화도 주화도 아니며, 늘 깨어 있는 것 밖에는 없을 것이다. 패전 이후에 한반도를 휩쓸게 되는 배청숭명사상 과 북벌론 또한 지나치게 감정에 치우친 경솔한 선택이라고 밖에는 보이지 않으며, 금나라의 여진족 발음인 ‘아이신지로’를 애신각라(愛新覺羅)로 표기한 것을 “新을 사랑하고 羅를 기억하자 " 라는 의미로 해석하여 신라를 잊지말자라는 뜻으로 보려고 하는 시도 또한 사실과는 거리가 먼 감정적 접근이라고 추측되나, 이 정도는 오히려 애교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최근들어 티벳과 신장.위그루 지역에서의 잦은 소수민족관련 분쟁을 겪고 있는 중국은 마치 pax china의 선전포고처럼 서방국가 및 주변 국가를 위협하고 있다. 중국은 21세기에 이르러 청나라의 역사를 쓰고 있다고 한다. 지금 변화된 공산주의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는 중국의 실상은 이념이나 정치가 아니라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은 1911년 이후에는 1950년대 인민 해방군 신강에 진입, 51년 중화인민 공화국 회복, 신강, 티벳에서는 사회주의 이념으로 묶어서 달라이 나마를 쫒아 내었던 당시의 사회주의 이념을 이미 버렸고, 지금은 바로 민족주의를 내세우기 위한 역사라고 본다 즉 과거에는 청사를 중국의 역사와 별도로 취급하다가 지금은 청나라를 중국의 역사에 편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변화를 깨어서 바라보아야 한다.
2009년 12월 20일 일요일
광해군 - 한명기의 <광해군>의 서문중에서
광해군을 쫒아낸 사람들, 그에게 '혼주'란 이름을 붙여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1630년 겨울, 조선은 청나라의 침입을 받는다. 이듬해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했다. 세번 큰 절을 올리고, 한 번 절할 때마다 이마를 세 번씩 조아리는 가장 치욕적인 항복 의식이었다. 이윽고 맏아들 소현세자와 둘째아들 봉림대군이 만주로 끌로가고 수만의 포로가 조선을 등져야 했다. 국왕이 그 치욕을 당하고 수만의 생령이 '도마 위의 고기'가 되기까지 쿠테타를 주도했던 공신등을 대부분 멀쩡했다. 그들은 정권을 획득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국가를 보위하는 데는 실패했다. 명과 후금을 구슬려 전쟁을 막고자 했단 광해군을 '패륜아'라고 욕했던 그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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